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해준 뒤,
우리는 오히려 더 바빠졌습니다
— 도구는 평준화되고, 차이는 디테일에서 나온다.
세탁기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런 미래를 그렸습니다. "이제 빨래에서 해방이다. 남는 시간에 책도 읽고, 일도 하고, 더 많은 걸 할 수 있겠지." 실제로 세탁기가 우리에게 준 시간은 어마어마했어요. 손으로 비벼 빨고, 삶고, 짜고, 널어 말리던 그 고된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줬으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세탁기가 보급된 뒤, 사람들의 가사 노동 시간은 정말 줄었을까요?
기술사학자 루스 코완(Ruth Schwartz Cowan)이 『More Work for Mother』라는 책에서 이걸 파헤쳤는데요. 결과가 의외였습니다.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었어요. 코완의 조사에 따르면 주당 세탁 시간은 1925년 5.8시간에서 1964년 6.2시간으로 도리어 늘었고, 1980년대 주부가 다루는 빨랫감은 무게로 따지면 이전 세대의 약 10배에 달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간단해요. 빨래가 쉬워지니 우리는 더 자주, 더 많이 빨기 시작한 겁니다. 예전엔 며칠씩 입던 옷을 이제는 한 번 입고 바로 세탁기에 넣죠. 속옷을 매일 갈아입는 것도 너무 당연해졌고요. 기계가 일을 대신해주자, 우리의 '기준'이 슬그머니 올라간 거예요. 굳이 말하자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달까요?

Nano Banana 2 생성 이미지
"더 많이"가 다가 아니었습니다 — "더 잘"의 시작
그런데 제가 더 흥미롭게 본 지점은 따로 있어요. 세탁기 이후 늘어난 건 빨래의 '양'만이 아니었습니다. 빨래의 '질'에 대한 고민도 같이 늘었거든요.
생각해보면 그렇잖아요. 우리 모두 세탁기에 옷을 한 번쯤 망쳐본 경험이 있죠. 아끼던 니트가 쪼그라들거나, 색이 번지거나… 그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우리는 갑자기 똑똑해집니다. "이 옷은 울코스로 돌려야겠다", "이건 세탁망에 넣어야지", "이건 아예 손빨래를 해야겠네", "여기엔 이 세제가 맞겠다" 하면서요.
즉, 세탁기가 기본적인 '빨기'를 대신해주자 우리의 관심은 더 위로 올라갔습니다. 단순히 '빨았다'가 아니라 '이 옷을 어떻게 다뤘는가'가 실력이 된 거죠. 그리고 이 분별력은 세탁기를 오래, 많이 써본 사람일수록 자연스럽게 몸에 뱁니다. 망쳐본 옷이 많을수록 더 잘 다루게 되는, 조금은 얄궂은 이치예요.